작성일 : 16-03-01 20:04
주님의 기도가 지닌 특별한 형식 - 로핑크 신부의 글입니다!^^
 글쓴이 : 주임 (125.♡.177.210)
조회 : 1,561   추천 : 0  
주님의 기도가 지닌 특별한 형식

  주님의 기도는 세상에서 가장 자주 바쳐지는 기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기도가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한 기도인 것은 결코 아니다. 주님의 기도는 일단, 또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주님의 기도는 산상수훈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산상수훈의 도입문이 보여주듯이 산상수훈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삼지 않고,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제자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마태 5,1~2 참조). 루카 복음서의 경우, 복음서의 독자들은 표면적으로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이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 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상황을 유일한 근거로 삼아 주님의 기도가 제자들만을 위한 기도라고 주장할 수는 물론 없다. 주님의 기도가 제자들의 기도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 내용 때문이다. 그러한 점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곳이 바로 네 번째 청원인 빵의 청원이다. 겉으로 봤을 때 빵의 청원은 팔레스티나의 일용직 노동자의 상황과 이 세상의 모든 배고파하고 욕망을 지닌 이들의 비참한 상황을 반영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빵의 청원은 예수님 제자들의 매우 특별한 삶의 상황에서 비롯된다. 빵의 청원기도는 제자들의 파견과 복음 선포의 사명과 상관이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다음 장에서 곧바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주님의 기도는 최우선적으로 제자들의 기도이다. 모든 구절에서 핵심은 예수 추종이 자기 자신의 욕구들이나 계획들을 떨쳐버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원한다는 것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기도를 바치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는 너무나 자주 시간 때우기용 기도로서, 일정한 시간을 재는 척도로서(“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시간만큼 쉴 필요가 있다.”), 혹은 고해성사 후 보속으로서(“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바치도록 하세요!”) 남용되어 왔다.
  그래도 초대 교회에서는 주님의 기도가 지닌 가치를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기억하고 있었다. 예비자 교리 기간의 말미에서야 예비자는 주님의 기도를 전수받았다. 즉, 세례를 원하는 이들은 세례를 받기 직전에야 주님의 기도를 배워 익혔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기도의 전승(traditio orationis)’이라 불렀다. 세례식이 끝난 뒤에 세례를 막 받은 이들은 비로소 장엄한 미사성제 안에서 공동체 전체와 함께 이 기도를 바칠 수 있었다. 예비자들에게 신앙의 고백을 전수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기도 또한 전수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주님의 기도는 자주 생기를 잃어버렸다. 마모되어 낡아버린 것이다. 마치 안개 속에 놓여 있는 풍광처럼 주님의 기도의 단어들과 구절들이 막연해져 버린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 이 모든 것이 날카로움을 잃어버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입에, 또 제자들의 귀에 주님의 기도는 분명하고 정확하며 뚜렷한 윤곽선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이러한 윤곽선을 다시 인식할 수 있으려면, 일단은 주님의 기도의 형식에 대해서 몇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 본문의 형식은 결코 우연일 수가 없다. 오히려 그보다는 그 내용과 상관이 있다. 우리는 다섯 가지 관점에서 주님의 기도의 형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주님의 기도는 순수한 청원기도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더 이상 논쟁이 필요 없는 부분은 다음이다: 즉, 찬미가인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역주: 독일에서는 전통적으로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에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를 첨부해서 바친다.
는 이차적으로 주님의 기도에 첨부되었다. 고대의 수사본들에는 이 마무리 영광송이 아직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이 마무리 영광송은 아마도 주님의 기도가 성찬례의 일부분이 되었을 당시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주님의 기도는 본래 순수한 청원기도였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찬미가를 가르치지 않으셨을까? 예를 들자면, 18개 청원기도들로 이루어져 있는 유다교의 ‘테필라(Tefilla)’와 비교할만한 그런 찬미가 말이다. 그 ‘테필라’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찬미받으소서, 주님, 우리 하느님, 우리 선조들의 하느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 위대하고 강하시고 두려움을 자아내시는 하느님, 최고의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시여. 우리의 방패이시며 우리 선조들의 방패이시며, 세세대대로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주님, 아브라함의 방패이시여.

  이스라엘의 이 일상적인 기도처럼 적어도 앞뒤가 찬가로 둘러싸여 있는 그런 기도를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으셨을까? 이에 대해 말이 되는 대답은 한 가지뿐이다. 즉, 하느님 백성이 처해 있는 어려운 곤궁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제발 개입해 달라는 절규와 마찬가지이다.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시편들을 포함한 당시의 모든 기도들을 알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찬미의 기도, 감사의 기도, 탄원의 기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그 고유하고 본래적인 기도는 순수한 청원기도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기도는 이제 도래할 하느님 나라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2. 주님의 기도는 매우 짧은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는 짧은 기도이다. 단순 비교를 위해서 유다교의 ‘테필라’를 살펴보면, 독일어로 번역된 ‘테필라’는 600개가 넘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님의 기도는 영광송을 제외하면 단지 49개의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히브리어 원본은 더 짧았다. 뒷부분의 찬가를 제외한 루카의 버전은 아마도 주님의 기도의 가장 오래된 형태를 나타내고 있을 것이며, 히브리어로 다시 재번역해 볼 때 단지 23개의 단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주님의 기도는 왜 이렇게 짧은 것일까? 그 해답은 주님의 기도 바로 앞의 본문인 마태 6,7~8에 분명하게 적혀 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3. 주님의 기도는 할 말을 곧바로 한다.

  비교를 위해 다시 한 번 유다교 기도인 테필라의 시작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찬미받으소서, 주님, 우리 하느님, 우리 선조들의 하느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 위대하고 강하시고 두려움을 자아내시는 하느님, 최고의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시여. 우리의 방패이시며 우리 선조들의 방패이시며, 세세대대로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주님, 아브라함의 방패이시여.

  이 기도는 서서히 접근한다. 기도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접적으로나마 언급하고 싶어 한다. 그런 다음에서야 그는 청원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 어쩌면 하느님께 곧바로 청원을 올리지 않는 것은 일종의 예의라 느꼈을 것이다. 그 배경에는 어쩌면 궁중예법의 일부분이 녹아 있을 수도 있다. 청원자가 임금의 알현실에 당도하기까지 그는 먼저 여러 개의 곁방들을 통과해야만 한다. 알현실에 도착해서도 그는 일단 기나긴 알현실을 가로질러 가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서야 그는 비로소 임금의 왕좌에 당도한다. 그는 넙죽 엎드린다. 임금의 신하 중 한 명이 허락의 수신호를 한 다음에서야 비로소 그는 말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심해야 한다. 그는 올바른 호칭을 선택해야 하며, 이러한 예절을 모두 완수한 다음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청원을 발설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고대 중동의 기도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고대 중동의 기도문들은 모두 신(神)을 부르는 데에 있어서 무척 높은 수준의 예절을 동원한다. 이런 기도문들과 주님의 기도를 비교해 보면, 하느님 호명(呼名)이 지닌 차이점은 유다교의 기도문들과 비교했을 때보다도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카드어(akkadisch)로 된 ‘두 손을 높이 들고 바치는 기도들’ 중 하나를 살펴보자면, 이 기도는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영광의 신, 아누(Anu)의 맏이시여,
  완전한 통치자, 엔메스카라(Enmescharra)의 아이이시여,
  영광의 팝수칼(Papsukkal)이시여, 아누(Anu)의 맏이시여,
  완전한 통치자, 엔메스카라(Enmescharra)의 아이이시여 …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러한 호칭들은 합당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기도를 듣지 않으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명된 신이 정말로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기 위해서 위와 같은 기도가 전부 반복된다. 사실 신(神)을 실수하지 않고 매번 부른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일단 정확한 언어구사를 해야 하고, 기도하는 기술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의 올바른 이름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한 것은 주님의 기도에 전혀 없다! 압바(Abba) - 이것이 유일한 호칭이다. 이것은 친숙한 호칭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대화의 상황은 임금의 궁중예절이 아닌 가족의 친밀함이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예수님이 뜻하신 “새로운 가족”의 친밀함이다. 가족끼리 대화할 때에는 빙 돌아가는 언사 없이 평범한 언어를 구사한다. 또 가족끼리 분위기가 좋으면 대화는 깊은 이해심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가 어떤 찬가도 없이 곧바로 청원을 바치는 형식의 기도이면서, 그토록 짧은 이유이다: 즉, 주님의 기도는 제자단이라는 새로운 가족을 위한 기도이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에는 그 어떤 화려함도, 그 어떠한 궁중예절의 흔적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교 기도들이 모두 길고 장황하다는 말은 아니다. 유다교에도 짧고 간결한 기도문들이 있다. 간결함의 측면에서 보자면 주님의 기도는 예컨대 유다교의 ‘카디쉬(Kaddisch)’에 비견할 만하다. 초대 버전의 ‘카디쉬’는 다음과 같다:

  그분의 위대한 이름이 그분의 뜻에 따라 만든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거룩하게 되소서. 그분께서 그대들의 생애에, 그대들의 날들에, 이스라엘 온 집안의 시대에 당신의 나라가 빨리 임하게 하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세세대대로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그래서 아멘이라 말하시오.

  한눈에 보이는 것처럼, 이 기도는 주님의 기도와 형식에서만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카디쉬의 첫 번째 청원은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두 번째 청원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이 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와 카디쉬 사이의 유사점은 눈에 곧바로 띈다.
  하지만 차이점들도 있다는 사실 역시 인지해야 한다. 카디쉬는 순수한 청원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여기서 인용된 버전에서 카디쉬의 마지막 부분은 찬가이다: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세세대대로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어쩌면 이 찬가 부분이 이 유다교 기도의 핵심이자 원천이었을지도 모른다(참조: 시편 113,2; 다니 2,20). 또 여기에 덧붙여 주의할 것이 있다: 즉, 카디쉬가 원래 독립적인 기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카디쉬는 긴 기도문의 마무리, 곧 끝부분이었다. 카디쉬는 시나고그 예배에서 성경의 해석을 끝내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에 반해서 주님의 기도는 독립적으로 바치는, 이례적으로 간결한 기도문이다.


4. 하느님의 일이 우선이다.

  주님의 기도는 확실하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마태오 버전에서 그 두 부분들은 3개 내지 4개의 청원들을 지닌다. 우선은 3개의 ‘당신’-청원들이 나온다:

  1)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2)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아버지의 뜻이 …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런 다음에 - 어떻게 세느냐에 따라 - 세 개 내지 네 개의 우리-청원들이 뒤따른다:

  4)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5) … 저희 잘못을 용서하소서;
  6)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7)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이렇게 이 기도는 매우 확실하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히브리어로 재번역해보면 이러한 두 부분으로의 구분은 리듬과 음률을 통해 더욱 확실하다. 첫 부분은 어미음률인 ‘-eka’를 통해 특징 지워지고, 둘째 부분은 어미음률인 ‘-enu’를 통해 그 특징이 드러난다.
주님의 기도의 첫 부분에서 주제는 하느님의 이름과 통치와 뜻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부분의 주제는 하느님의 걱정이라 할 수도 있겠다. 둘째 부분에서야 제자들의 걱정이 다루어진다. 즉, 먹을거리와 죄를 통한 곤경과 유혹들로 인한 고난에 대한 그들의 걱정이 다루어진다. 이로써 주님의 기도의 구조는 정확하게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상응한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5.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통해 역사하신다.

  다시 한 번 주님의 기도에 대해서 순수하게 형식적인 측면에 대한 고찰을 시도해 보자. 세 개의 첫 번째 청원들은 독특하게 작성되어 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어서 이 기도가 얼마나 이상하게 지어져 있는지를 더 이상 눈치 채지 못한다. 하지만 일상 삶 안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계단이 닦여지게 하소서 …
  깨끗함이 오소서 …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에는 누가 행위자인지, 누가 행동하는 주체인지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계단이 닦여지게 하소서”라 하지 않고 “계단을 닦아주세요!”라고 말한다. 주님의 기도는 왜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기도하지 않을까?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인도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주소서.

  주님의 기도를 해석한 많은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주님의 기도가 구조적으로 지닌 간접화법은 예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 곧바로 말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하느님”이란 단어의 사용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신적 수동태(passivum divinum)”가 활용된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는 예컨대 하느님을 너무 정면으로 대하지 않게 해주는 완곡한 표현을 나타낸다. 그래서 “하느님, 당신께서 당신의 이름을 빛내소서”가 아니라 “아버지(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궁중예법은 적어도 주님의 기도의 경우에 적용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서 이미 살펴보았지만, 주님의 기도는 어떤 궁중예법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에서는 가정집에서의 화법이 사용된다. 즉, 직설적으로, 또 미사여구도 없이. 더구나 주님의 기도의 둘째 부분은 매우 직설적이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둘째 부분에서 나타나는 이런 표현들은 모두 예외 없이 하느님께 직접 드리는 청원들이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 에둘러 가는 길 없이 직설적으로 다가서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 개의 첫 청원들은 왜 에둘러서 하는 말씨로 구성되었을까?
  여기에는 한 가지 이유만이 있을 수 있다: 즉, 에둘러 표현하는 구성들, 특히 첫 번째 청원의 수동태는 행위자가 누구인지를 열어두고 있다. “아버지(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 여기에 다음을 첨부시킬 수 있겠다: 당신 스스로에 의해서. 하지만 다음을 첨부해도 말이 된다: 인간들에 의해서. 두 경우 다 가능하며, 둘 다 맞다. 그리고 이런 해석의 이중성을 예수님께서 고의로 꾀하셨음이 분명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당신이 스스로 거룩하게 빛내셔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당신의 나라가 도래하도록 하셔야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스스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셔야 한다. 이것이 최우선적이며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동시에 제자들 역시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야 한다. 제자들은 또한 하느님의 나라에 공간을 마련해야 하며, 제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의 첫 번째 부분의 세 가지 청원들은 이들이 지닌 언어 형식의 도움을 받아 근본적인 신학적 내용을 전달하고자 한다. 즉,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행동하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립성과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뜻을 자기 뜻으로 만들어 당신께서 행동할 여지를 마련해 주는 인간들을 찾지 못하시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신다.
  이렇듯이 주님의 기도는 그 형식만으로도 이미 많은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 기도가 지닌 7개의 청원기도들은 얼마나 많은 신학적 내용을 지니고 있겠는가! 주님의 기도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원의와 기대를 모두 종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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