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3-08 14:30
글쓴이 :
주임신부 (125.♡.177.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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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리
주님의 기도는 세상 모든 이를 위한 기도가 아니다. 성경학의 전문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주님의 기도는 확실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지니고 있다. 이 기도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단을 위한 기도이다. 이러한 점은 특히 주님의 기도의 네 번째 청원기도인 ‘빵의 청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 네 번째 청원기도를 제일 먼저 다루고자 한다. 주님의 기도의 다른 어떤 청원들보다 이 청원기도가 주님 기도의 ‘삶의 자리’를 제일 잘 조명해주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가 생겨난 원래의 상황이란 어떠했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주님의 기도를 바쳤을까?
예수님께서는 방랑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의 곳곳을 다니셨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전역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할 수 있기 위해 항상 여정 중에 계셨다. 이 여정에는 열두 사도들이 예수님을 수행하였다. 그 열두 명 외에도 예수님을 수행한 제자들이 더 많이 있었다.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 뒤를 따랐다. 일단 “뒤따름(추종)”의 자구적 의미를 살펴보면, 이는 예수님과 함께 여행을 다닌다는 것을 뜻한다. 대부분 아침에 여행을 떠나면서도 저녁을 어디서 지내게 될지 아직 모르는 그런 여행에 예수님을 수행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하지만 예수님을 뒤쫓아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지 않으면서도 그분의 복음 선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일정한 지역에서 생활하면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된 사람들, 즉, 병에서 치유된 이들, 친구들, 후원자들, 동조자들, 그리고 선의의 의미에서 호기심을 가졌던 이들이었다. 이런 친구들과 도우미들도 예수님께서는 필요로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의도적으로 아무런 보급물자나 무기 없이 여행을 다니셨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당시에는 무기를 지닌 열혈당원들(Zeloten)이 로마인들에게 대항하여 반기를 들기 위해서 동조자들과 돈과 무기들을 모으고자 이스라엘 전역을 다녔는데, 무기를 지니지 않음으로써 예수님과 제자들은 열혈당원들과 의식적인 차별을 두고자 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혈당원들로 오해받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은 돈이나 무기 없이 다녀야만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돌아다니려면 그들을 저녁에 자기 집들에 받아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거기에다가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고 저녁에 보호를 보장해줄 이들이 필요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복음서의 파견 담화문들(예를 들어, 루카 10장)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루카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은 길을 가면서 절대로 다른 이와 인사를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 말은 서로 지나치면서 나누는 짧은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물론 아니다. 당시에 사람이 없는 지방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길게 대화를 나누곤 했다고 한다. 이런 긴 대화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되겠다. 이 때 여행자들은 서로 간에 어디에서 왔으며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를 서로 묻고, 어디에 물이 있는지를 말해 주며, 또 근자에 있던 도둑들의 출몰현황을 가르쳐 주었다. 또 이들은 각자가 전해들은 새로운 소식들(뉴스들)을 주고받았다. 오늘날로 치자면, 텔레비전을 보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듯이, 이런 끝없이 이어지던 대화들은 하루의 많은 부분을 허송하게 만들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루카 10,3~7).
파견 담화문의 또 다른 버전들을 보면, 제자들은 길을 가면서 음식을 싸가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참조: 마르 6,8; 루카 9,3). 얼핏 보면, 제자들은 가능하면 많이 금식을 하고 검소하고 금욕주의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파견 담화문의 주제는 결코 금욕주의적 생활이나 생리적 욕구의 근절 내지 철학적 청빈의 이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열성당원들과 분명한 차별성을 두고, 평화를 위해 투신하고, 폭력과 전쟁을 반대하는 활동에 투신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한 데 모여서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낼 그 이스라엘에는 어떤 폭력도 어떤 하느님의 전사(戰士)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은 평화의 장소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때 어떤 보급물도 어떤 무기도 지녀서는 안 된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지팡이마저도 예수님께서는 지니지 말라고 엄격하게 금지하신다(마태 10,10; 루카 9,3; 마르 6,8에서는 완화된 형태로 나타남). 신발마저 지니지 말라고 금지하시는데, 이는 신발이 있으면 자갈밭에서도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금지 규정 역시 제자들의 무방비의 상태를 나타낸다.
제자들은 보급품도 돈도 없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그들을 자기 집에 받아들여서 먹을 것을 주고 다음 날 여정에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줄 이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에서 빵의 청원을 바치는 것이다!
여기에 또 다른 원인들도 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떠난 사람들이다. 자기 집, 자기 가족, 자기 직업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가족을 떠났다는 것은 대가족을 떠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가족을 돌보고 보호해준 아버지 곁을 떠났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가장이 자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자기 가족을 떠난 이들은 더 이상 아버지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그들의 ‘압바(abba)’, 그들을 사랑해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 시작에 나타나는 ‘압바(abba)’는 임의적인 면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제자들이 현재 함께 생활하고 있는 그 새 가족의 정확한 상황을 묘사해 준다. 예수님을 뒤따르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은 완전히 새롭고 전적인 의미에서 아버지가 되신다. 전에 그들 육체적 아버지가 그들을 보살펴준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보살펴 주신다. 그들은 하느님을 철저하게 신뢰해도 된다.
그럼에도 이런 신뢰는 무슨 마법적인 믿음, 비이성적이고 비현실적인 믿음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그들의 새로운 ‘압바’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현실적이다. 저녁이 되어서 잠자리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마다 언제든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을 받아줄 집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도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제로 「새로운 가족」의 일원으로서 산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서 자신들의 원래 가족을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그 대신에 그들은 다수의 “형제와 자매”(마르 10,30)들로 구성된 새 가족을 찾았다. 이 새 가족에는 제자들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전국 방방곡곡의 친구들, 동조자들, 또 묵묵히 도와주는 도우미들 역시 그 가족의 일원들이다. 이 모든 내용이 ‘압바’라고 하느님을 부르면서 시작되고 넷째 청원에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주님의 기도에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일용할” 빵이라고? 이 어휘는 무척 번역하기가 난해하다. 그리스어 본문에는 “ton arton hemon ton epiousion”이라고 적혀 있다. 대부분의 경우 epiousios는 “매일같이(일용할)”로 번역된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로는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번역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그리스어 문헌들 어디에서도 주님의 기도가 아닌 성경 구절들 안에서 epiousios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 단어가 본래 무슨 뜻인지를 우리는 새롭게 규명해야만 한다.
아마도 이 단어는 그 다음 날, 그러니까 그날의 뒤를 잇는 날에 필요한 양식에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다음 날은 이미 저녁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epiousios는 opienai(=임박해 있다, 뒤따르다)에서 유래한다. 사도행전은 항상 “임박해 있는 (날)”을 반복해서 언급한다. 그것도 epienai의 도움을 받아서(참조: 사도 7,26; 16,11; 20,15; 21,18)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에서 저녁 내지 그 다음 날을 위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장기간의 미래를 위해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 계획 같은 것은 없다. 종말론적 상황이 너무나도 절박하고 현재의 복음 선포가 너무나도 우선순위에 놓여 있기에 미래에 대한 계획은 불가능하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저녁에는 어디에 가 있게 될지 아침에는 아직 모른다. 그들은 항상 오늘만을 살 뿐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란 것이 고작해야 다음 날까지만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빵을 청하는 그들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바꿔서 바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자기 집에 받아들여주고 저녁에 먹을 것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소서. 그래서 우리 양식이, 우리 생명이 다시 하루 더 보장될 수 있게 해주소서. -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청할 필요도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상황은 구약성경의 광야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이 처해 있던 상황과 비슷하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탈출함으로써 복지국가 이집트의 현세적 보살핌을 탈피하였다. 상호간의 연대성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질서가 시작되어야 한다. 광야의 특별한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신다. 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은 만나를 보관하거나 저장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사바트(안식일)」 전날을 제외하고는 하루 동안 먹을 양식만 쌓아두는 것이 허용되었다. 탈출 16,4에 “그날 먹을 만큼”의 정량(탈출 16,4; debar jom bejomo)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다가오는 하루를 위한 할당량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epiousios는 그리스어로 탈출 16,4에 나와 있는 “그날 먹을 만큼”이란 개념을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언어학적인 분석과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만나 이야기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서도 그날 하루를 위한 빵을 청하는 기도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무척 희박하다고 보여진다. 예수님께서는 현재에 이스라엘 전국에 흩어져서 ‘늑대들 가운데 있는 양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는 당신 제자들의 처지가, 이스라엘이 과거에 광야에 있으면서 처해 있던 상황과 근본적으로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님의 기도의 이 청원기도는 마태 6,34에 나오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에 상응한다. 여기서도 단 하루에 해당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하루가 정확하게 어떤 날을 말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물론 없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앞에서 이미 살펴본 내용이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즉, 이런 종류의 태평함은 꿈이나 꾸는 몽상가의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태도와 무관하다. 왜냐하면 제자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방방곡곡에 자기 집들을 제공해주는 동조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외된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전국 어디에 가도 그런 동조자들이 많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우선 베타니아의 라자로와 그의 누이들인 마리아와 마르타가 떠오른다(루카 10,38~42; 요한 11,1~5). 또 이름은 비록 모르지만 예수님의 수난 전날 마지막 만찬을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시설이 갖춰진 자기 다락방을 제공해준 남자 역시 그런 부류의 도우미였다(마르 14,12~16).
주님의 기도의 빵의 청원기도는 이스라엘에 뭔가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삶을 위한 보조수단이나 보급품 없이 파견된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압바(abba)’를 믿고, 각자 자기 삶의 터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다른 이들의 연대성을 신뢰한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가 가진 모든 힘을 온전히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에 투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의 빵을 청하는 기도는 절대로 천진난만하지 않다. 이 기도는 소시민적인 배부름을 유지해 달라는 청원도, ‘세상을 위한 양식’을 달라는 청원조차도 바치지 않는다. 이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복음 선포에 필요한 힘과 자유공간을 매일 같이 최소한의 분량만 달라고 청한다.
따라서 이 청원기도는 간접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사회, 새로운 가족을 달라고 기도한다. 이 사회 내지 가족 안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 모두가 상호간에 돕는다. 부활 공동체들은 이런 새로운 유형의 연대성을 ‘아가페(agape)’라 불렀다. 아가페란 말은 각자가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고, 그 타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물으면서 돕는 것을 의미한다. 아가페 안에서의 이러한 ‘더불어-삶’의 목표는 사도적 작업의 실현이다: 즉, 예수님의 공동체가 그 메신저들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주님의 기도는 결코 천진난만한 기도가 아니다. 겉으로 봤을 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용할 빵의 청원기도마저 결코 무해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청원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를 바치는 사람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을 원한다는 것을, 매일 같이 수많은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살고자 함을, 또 이로써 가능해진 복음을 위한 투신을 원한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의 넷째 청원기도를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확실히 드러난다: 즉, 성경 본문의 형식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물음은 결코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본문을 보다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런 질문에 대답할 때에만 우리는 그 본문을 우리 자신의 상황에 맞게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이 본문과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실천하며 사는가? 빵의 청원기도의 경우: 다른 이들이 복음 선포를 위해 투신하는 것을 후원하고자 하는 협력자들이 우리 공동체에서는 신약성경이 요구하는 그런 더불어 사는 모습을 항상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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