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3-22 16:52
글쓴이 :
주임신부 (125.♡.177.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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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백성의 모집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기도를 종교적 심판의 잣대로 삼고자 한다면, 주님의 기도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주님의 기도를 이용해서 남을 심판하는 행위는 아무런 구속력도 없기 때문이다. 또 주님의 기도가 자기 구원의 잣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반발하고 분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그들의 분노는 자칫 잘못된 주소를 향할 수도 있다: 즉, 주님의 기도 그 자체를 향할 수 있다. 1992년에 예술가인 Cosy Piéro는 뮌헨의 Theatiner 교회의 정문에 커다란 플랭카드를 달았다. 그 플랭카드 위에 그녀는 아래와 같이 주님의 기도 내용을 바꿔서 적어놨다:
지상 위에서 ‘나’인 인간이며,
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며,
나의 나라가 되며,
이것이 나의 자유의지를 통해 이루어져라.
나는 나의 죄와
내 이웃의 죄를 용서하며,
모든 악에서 나를 해방시킨다.
왜냐하면 이것이 나의 힘이며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동안.
이제 인간이 중심점에 서 있다. 인간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한다. 하느님의 이름은 더 이상 거룩히 빛나지 않고, 그 대신에 자기 이름이 거룩히 빛난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나라를 희망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를 높이 들어 올리고, 모든 악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해방시킨다.
이 ‘주님의 기도’는 솔직하고자 한다. 그저 일반적인 종교적 요설에 불과한 주님의 기도에는 반발한다. 우리가 거기서 비는 내용을 이 ‘주님의 기도’는 믿어주지 않는다. 주님의 기도가 그 근저에 주님 기도의 내용에 상응하는 하나의 사회를 지니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주님의 기도를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근거, 이러한 기초는 추종자들과 제자들이다. 또 이들 주위에는 제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해주며 제자들의 인도를 받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곧 신약성경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백성이다.
다만 놀라운 점은 제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해주는 이 하느님 백성이 주님의 기도 안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정말 이상하다. 유다인들에게는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였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진짜 이상한 일이다. 첫 번째 예: 카디쉬(Kaddisch). 카디쉬는 ‘이스라엘의 집 전체’의 희망을 강조한다. 두 번째 예: 18개 청원기도인 테필라(Tefilla). 이 기도의 일곱 번째 청원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비참함을 돌아보소서. 우리의 싸움을 이끌어주소서.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당신은 찬미 받으소서.
주님, 이스라엘의 구세주.
또 여덟 번째 청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주님, 우리 하느님,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것에서 우리를 치유해주소서.
우리에게서 아픔과 비참함을 거두어 주소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서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는 주님, 당신은 찬미 받으소서.
열네 번째 청원은 다음과 같다:
주님, 우리 하느님, 당신의 재산에 자비를 베푸소서.
이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 당신 영광의 거처인 시온에,
또 당신 집인 당신 성전에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합법적인 기름부음받은이인 다윗 집의 왕국에 자비를 베푸소서.
예루살렘을 지은 다윗의 하느님, 주님,
당신은 찬미 받으소서.
마지막 청원인 열여덟 번째 청원기도는 다음과 같다:
당신 백성 이스라엘과 당신 유산인 당신 도성에 당신의 평화를 두시고,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축복을 선사하소서.
평화를 이루시는 주님, 당신은 찬미 받으소서.
이렇게 테필라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백성을 주제로 삼고 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유다교 신학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기도의 주제인 것은 당연지사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하느님의 백성은 왜 주님의 기도에서는 나타나지 않을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하느님 백성은 주님의 기도에 나타나 있다. 우리가 무지해서 못 볼 뿐이다. 그 만큼 우리는 성경 안에서 살지 않고 있다. 우리 주제인 주님의 기도의 첫째 청원기도만 하더라도, 하느님 백성을 모아 거룩하게 해달라는 내용이지 않은가.
“아버지(당신)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소서”: 이런 언어는 우리에게 낯선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런 언어가 우리 가운데 아직도 흔적을 남기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은 유아적 고백문 안에서다: “나는 하느님의 이름을 불경스럽게 발설하였습니다.”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Ich habe den Namen Gottes unehrerbietig im Munde geführt.”
하지만 성경에서 ‘이름을 거룩하게 함’은 하느님의 이름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입에 올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름을 거룩하게 함”이란 공식의 배경은 에제키엘서, 특히 이 예언서의 20장과 36장이 되겠다. 에제키엘서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은 항상 다루어지는 중요한 주제이며,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해진다는 진술문에서 하느님이 행위하는 주체로 등장하는 유일한 곳이다(에제 36,23). 이름의 거룩함/영광(qiddusch haschschem) 그 자체는 구약성경과 유다교 안에서 널리 다뤄진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주체는 언제나 인간 내지 이스라엘 백성이며, 종국에는 계명들의 준수가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 관심사이다. 특별히 이런 점은 레위 22,31~33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에 반해서 하느님께서 손수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진술문은 우리를 에제키엘서로 인도해준다. 따라서 우리 에제 36장의 본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에제 36장은 의심의 여지없이 주님의 기도의 첫째 청원기도의 배경을 형성한다.
그래서 그들을 민족들 사이로 쫓아 버리고 여러 나라로 흩어 버렸다. 그들의 길과 행실에 따라 그들을 심판하였다. 사람들이 그들을 두고, ‘이자들은 주님의 백성인데 그분 땅에서 나와야만 했지.’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가는 곳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래서 나는 이스라엘 집안이 민족들 사이로 흩어져 가 거기에서 더럽힌 나의 이름을 걱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민족들 사이로 흩어져 가 거기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 때문이다. 나는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곧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에제 36,19~28)
에제키엘서 전반에 걸쳐 나와 있는 구원에 대한 희망을 시적으로 종합하고 있는 위의 본문에서 우리는 6가지 진술내용을 발견한다:
1.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선물로 주신 땅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회질서에 따라 살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선택해준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로써 이스라엘은 그 땅을 무시했고 하느님의 이름을 속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그 땅을 질투와 미움과 경쟁심으로 가득 채웠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그 땅을 망쳤으며, 이 땅에서 원래 비롯되어야 할 영광의 빛을 파괴하였다.
2. 하느님께서는 그 땅이 이렇게 속화(俗化)되고 무시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쫓아내시어 이교 민족들 사이에 흩어지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왜 쫓아내어야만 했을까? 우리 현대인들은 이런 하느님의 이미지를 거부한다. 하느님께서는 꼭 벌을 주셔야 하나? 하느님께서 꼭 쫓아내셔야만 하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보다 잘 이해하자면, 우리는 이런 진술문들을 철저하게 인간의 시각에서 작성해야만 한다. 이에 따르자면,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지속적으로 거스르는 사회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파괴한다. 이러한 것은 다른 민족들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엄하게 적용된다. 하느님의 백성이 변함없이 자기 소명을 거슬러 행동하면, 그들은 자기 발판이 되어주는 땅을 파괴한다. 자기 근거지를 파괴하는 셈이다. 자기 땅을 스스로 잃어버린다.
3. 이스라엘이 스스로 그 원인을 제공한 타민족들 사이의 유배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런 형식의 유배로 인해 하느님의 이름이 더욱 속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세상이 이 민족과 더불어 속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세상이 이 민족과 그 하느님에 대해 조소한다. 그들은 말한다. 이 야훼(JHWH)가 얼마나 불쌍하고 무능력하냐. 이 야훼는 자기 백성을 배려하지 않는 신(神)이고, 자기 백성이 없는 신이며, 또 자기 땅이 없는 신이다.
4.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이렇게 무시당하는 것을 끝내셔야 한다. 이스라엘이 민족들 사이에 흩어져 있어서 당신의 이름이 계속해서 비웃음을 사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수수방관하실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직접 모든 민족들 앞에서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행동을 취하신 것은 결코 이스라엘의 공로 때문이 아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민족들 사이로 흩어져 가 거기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 때문이다.”
5. 하느님께서는 이 참을 수 없는 상태를 어떻게 끝내시는가? 그분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거룩하게 빛내실 것인가? 그분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기 위해서 당신의 흩어진 백성을 다시 한데로 모아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인도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우상들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신다. 하느님께서는 가슴에서 돌 같은 심장을 도려내시고 그들에게 육으로 된 심장을 선사해주신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회질서에 따라 사는 것이 가능해진다.
6. 쇄신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다시금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게 되는 그 순간에 그 땅이 변한다. 곡식은 풍성하게 자란다. 과일 나무들에는 과일들이 가득 달려 있다. 황폐해진 그 땅은 낙원으로 변한다. 경제적으로 빈곤하던 도성들은 다시 아름다워진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질 때에서야 비로소 민족들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들 앞에서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빛날 것이며 민족들은 하느님께 경배를 드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황폐하였던 이 땅이 에덴 정원처럼 되었구나. 폐허가 되고 황폐해지고 허물어졌던 성읍들이 다시 요새가 되어 사람들이 살게 되었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그제야 나 주님이 허물어진 것을 다시 세우고 폐허가 된 곳에 초목을 다시 심었음을, 너희 둘레에 남아 있는 민족들이 알게 될 것이다.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에제 36,35~36).
주님의 기도의 첫째 청원기도는 위에서 서술한 에제 36장의 전체 내용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실상 하느님께 다음을 청하는 것이다:
-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받아들이시기를;
- 하느님께서 흩어진 당신 백성을 모으시기를;
-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하나의 백성으로 다시 만드시기를;
-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를;
-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성령으로 채워 주시기를.
달리 표현하자면, 주님의 기도의 첫째 청원기도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이 가시화될 수 있는 곳이 세상에 다시금 생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곳’ 하면 이교인들조차 하느님의 이름을 존중하게 되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그런 곳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 백성의 등장은 유다교의 18개 청원기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윗의 집이 등장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도성 역시 언급되지 않는다. 시온과 예루살렘 성전도 지칭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예수님의 시대에는 정치적인 오해를 낳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예수님께서 지속적으로 대면해야 했던 열성당원들의 운동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의 사상을 통하여 오해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 중요했던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선한 이름뿐이다. 하느님의 유일한 영광은 당신의 백성이다. 그러나 민족주의적으로 이해된 그런 백성이 아니라 에제키엘이 이해한 그런 백성이다. 그러기에 이 기도는 제자 공동체의 오순절 체험에 이미 개방되어 있다.
주님의 기도의 첫째 청원기도를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절실한 청원으로 생각하셨음이 분명하며, 이 첫째 청원은 따라서 내용적으로 정확하게 윤곽이 접힌, 정확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 청원은 하느님 백성의 종말론적인 모임과 재구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게 된다.
이로써 주님의 기도의 전체적인 주장이 분명해졌다. 주님의 기도를 바쳐도 되는 이는 흩어지고 갈라진 하느님 백성이 다시 모이기를 갈망하는 자라야 한다. 이 기도를 바칠 자격이 있는 이는 자기가 가진 모든 역량을 다해서 하느님 백성의 쇄신을 위해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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